나무라디오

김이듬 - 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

이건 내가 쓴 시가 아니에요

대충 만년필로 휘갈긴 것도 있고
침 묻힌 몽당연필로 꾹꾹 눌러쓰고 빨간 밑줄을 그은 것도 있네요

나는 안경을 쓰고 세심하게 윤문하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자 때문에 제멋대로 몇 자 넣을 때도 있어요
간혹 자기소개서 대행업체 직원같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을 때도 있답니다

이 시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난 혼자 피크닉을 떠났어요

바위에서 물이 쏟아지고 죽은 새의 깃털이 펄럭일 때
숲 속의 가지 끝에서 누군가 웁니다

리본을 풀고 붉은 책을 펼칩니다
나는 당신을 만집니다

뺨의 체온 머리칼의 감촉
나는 당신을 다 꺼내놓을 수 없습니다
시럽에 빠뜨린 크래커를 건지듯
따뜻한 틀 속의 쿠키를 꺼내듯
단지 나는 당신을 가지고 만든 책을 봅니다

당신은 키스로 봉한 편지처럼 오래된 노래
나를 봉하는 데 실패한 사람
보석처럼 빛나는 유골
없는 발로 꾹꾹 눌러쓴 책
단지 나는 당신을 여과하고 퇴고하고
나와 상관없이 흐르는 당신을 옮겨 적습니다

그러니 이 시는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내 안에 침묵한 당신은 내 말의 시작
이 시의 끝이고 한계



<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 지성사. 2011년

(November 9th 2019)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