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조정인 - 버찌, 혹은 몰락


이후

바람을 선율로 바꾸는 자의 손가락이 빠르게 스쳐 잎사귀를 일으켰다
이마가 서늘했다 악보 한 장 몸속 찬물 같은 어딘가로 깊숙이 떨어졌다

젖은 악보를 짚어 가다 열매를 열애로 오독했다 잎사귀 사이
버찌가 얼굴을 붉혔다 봄날은 그렇게 번졌다

나는 당신께 옮아가 무수히 흩날릴 것이다
다 털릴 것이다 소거될 것이다

사랑의 정점을 몰락으로 말하는 나무

스스로 혹독하여 스스로 단두대를 세운 나무 거뭇거뭇 낭자한
혈흔을 남겼다

버찌, 혹은
몰락을 밟으며 나무 아래를 간다, 사랑의 희미한 기원을 더듬어

여기서 사랑의 과원은 얼마나 먼가, 그곳에 당신이 있기는 한가



<사과 얼마예요>
민음사. 2019년

(November 9th 2019)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