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이제니 - 언젠가 가게 될 해변

해변은 자음과 모음으로 가득 차 있다. 모래알과 모래알 속에는 시간이 가득하다. 시간과 시간 사이로 모래알이 스며든다. 미약한 마음이 미약한 걸음으로. 미약한 걸음이 다시 미약한 마음으로. 너는 너를 잃어 가고 있다. 너는 너를 잃어 가면서 비밀을 걷고 있다. 노을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슬픔은 점점 진해지고 있다. 언젠가 가게 될 해변. 우리가 줍게 될 조약돌과 조약돌이 호주머니 속에 가득하다.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다시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휩쓸리고 휩쓸려 갈 조약돌의 박자로.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게 될 목소리의 여운으로.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다시 흰 돌 하나 검은 돌 하나. 미래의 빛은 미래의 빛으로 남겨져 있다. 언젠가 언제고 가게 될 해변. 별이 쏟아질 수도 있는 밤하늘의 저편으로. 전날의 나무들이 줄줄이 달아나던 들판이 겹쳐 흐를 때. 비밀 없는 마음이 간신히 비밀 하나를 얻어 천천히 죽어 갈 때. 물새와 그림자 사이에서. 파도와 수평선 너머로. 저녁노을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우며 색색의 영혼을 우리 눈앞으로 데려온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서 액체가 흘러내린다. 우리는 우리로부터 달아나면서 가까워지고 있다. 그때. 무언가 다른 눈으로 무언가 다른 풍경을 바라볼 때. 그때. 그 밤의 그 맑음을 무엇이라 불러야 했을까. 그때. 그 어둠의 그 환함을 우리의 몸 어디에다 새겨 둬야 했을까. 모래 혹은 자갈 속에서. 물결 혹은 물풀 사이에서. 해변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걸음과 걸음은 얼굴과 얼굴을 데려온다. 무한히 전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간이라 부를 때. 그러니까 해변은 무언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의 구분 없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음과 물음으로. 물거품과 물거품으로. 언젠가 가게 될 해변. 언제고 다시 가게 될 우리들의 해변.



<시로 여는 세상> 2016년 가을호

(October 8th 2019)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