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이병률 - 노년

어느 날 모든 비밀번호는 사라지고
모든 것들은 잠긴다

풀에 스치고 넘어지고
얼굴들에 밀리고 무너지고

감촉이 파이고
문고리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는 오래 빈집을 전전하였으나
빈창고 하나가 정해지면 무엇을 넣을지도
결심하지 못했다

돌아가자는 말은 흐릿하고
가야 할 길도 흐릿하다

오래 교실에 다닌 적이 있었다
파도를 느꼈으나 그가 허락할 만한 세기는 아니었다

서점 이웃으로도 산 적이 있었다
경우에 따라 두텁거나 가벼운 친밀감을 스칠 뿐이었다

오래 붙들고 산 풍경 같은 것은 남아 있었다

중생대의 뼈들이 들여다보이는 박물관 창문 앞을 지나는 길
늘 지나는 길인데
보내고 보내고 또 보냈을 법한 냄새가 따라 붙었다

'여기'라는 말에 홀렸으며
'그곳'이라는 말을 참으며 살았으니

여기를 떠나 이제 그곳에 도달한 한 사람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 2017년

(April 3rd 2019)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