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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은 대가야 못잖은 가야왕국이었다(February 4th 2018)  /  가야

운봉고원 가야고분 100여기 아영면 두락리 32호 고분선 금동신발 등 유물 100점 출토

최근 남원지역에서 잊혀 묻힐뻔 했던 1500여년전의 운봉가야왕국이 마치 블랙박스 속 영상처럼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남원시가 지난 2013년 전북대학교 박물관(당시 조사책임 김승옥 교수)에 의뢰해 발굴조사한 아영면 두락리 32호 가야고분은 학계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져 주었다. 32호 고분군은 직경 21m의 큰 타원형 고분이며 화강암층을 평탄작업을 통해 내부에 석곽 2기를 시설했다.

중앙에 놓여진 주곽(무덤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 묻힌 곽)은 길이 7.3m, 너비 1.3m, 깊이가 1.8m에 달하며 토층의 함몰양상과 봉분외곽선을 연장해 추정하면 봉분 높이는 3.2m 가량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봉분의 동쪽은 지형상 능선하단부와 연결시켜 더 높아 보이게 했다. 동쪽의 봉분끝자락에서 추정하면 높이 6m로 고총고분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두락리 32호 고분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에게 의해 무참히 도굴되었음에도 금동신발과 청동거울, 토기류 40여점, 철기류 등 1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금동신발은 가야문화권에서 처음으로 출토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금동신발은 마름모 문양이 새겨졌다는 점에서 익산 입점리 유적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유사하다. 금동신발은 당시 왕족같은 상위 지배계층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만 발견됐던 것으로 보아 이 32호 고분 주인도 이 지역의 지배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중국 후한시대 양식의 청동거울도 발견됐다. 이 청동거울은 무덤 주인의 머리위에 놓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거울은 직경 약 17.8cm이다. 전면에 주칠흔이 확인되고, 경면에는 주칠과 목칠흔이 차례로 확인된다. 보존처리 전이라 정확한 문양을 파악하기 어려우나 전체적인 형태·돌기·구조에서 무령왕릉 출토 수대경(국보 제161호)과 흡사하다.
이 곳에서 발굴된 청동거울은 왕릉급 고분에서 부장된 예로는 삼국시대 최초로 판단돼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32호 고분에서는 말뼈가 출토되었는데 말뼈는 마한백제지역의 경우 공산성, 풍납토성, 군산 산월리, 나주 복암리유적에서 출토된 적은 있으나 봉분내에 의례로 같이 묻힌 예는 처음이다.

한때 학계에서는 당시 남원지역은 마한과 백제의 영역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해 왔지만 아영면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이 발굴되면서 달라졌다. 남원에도 가야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했던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가야는 경남과 경북 일부 지역에 자리를 잡은 연맹왕국이었다는 기존 학계의 정설을 뒤집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처럼 고분의 규모와 위치, 출토유물로 보아 남원지역에 뿌리를 내렸던 가야세력은 고령의 대가야, 웅진도읍기의 백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고대 국가를 이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에는 100여기의 가야계 고분이 산재하고 있어 앞으로 가야 국가의 실체를 증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고분 중 일부는 봉분을 깎아 밭으로 쓰거나 일부는 봉분 위에 소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 고분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남원시는 이런 악조건 상황에서도 남원 동부의 가야계 고분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포함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원가야문화를 논할 때 빠트려선 안되는 것이 ‘철’이다. 풍악의 지역, 예향의 고향, 농산물이 주를 이뤘던 이 남원지역은 ‘철’에 의해 흥망이 갈렸던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남원운봉고원지역은 니켈이 다량 함유된 우리나라 최상급 철광석 산지로 평가되고 있어, 남원운봉가야세력이 ‘철의왕국’을 꽃 피웠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 513년 백제 무령왕은 정치안정을 발판으로 철산지인 운봉고원을 차지하기 위해 3년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백제는 신라의 아막성(운봉고원 서북쪽 관문인 치재 남쪽에 위치 추정)을 차지하기 위해 20년 넘게 신라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백제 무왕은 즉위 3년 만에 4만의 군대를 동원 아막성을 공격했지만 대패했고, 616년에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624년 백두대간을 넘어 운봉고원을 다시 백제에 예속시켰고, 이를 기반으로 경남 함양까지도 백제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백두대간에서 20년 넘게 이어진 아막성 전투는 철산지인 운봉고원을 차지하기 위한 ‘철의 전쟁’이었다. 백제 무왕은 중흥프로젝트를 위해 국내 최고 품질의 철산지였던 운봉고원의 장악이 절실했던 것이다. 삼국시대 때 가장 역동적인 역사의 발전상을 보인 곳이 운봉고원이다. 가야와 백제, 신라가 국운을 걸고 서로 운봉고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펼쳐 삼국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

이처럼 삼국문화의 보고로 알려진 남원지역이 지난 2013년부터 새로운 역사로 재평가 받고 있다.

한편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고 철이 우수한 곳으로 소개된 백제와 가야의 국경지역인 ‘기문’ 또한 철의 왕국인 운봉고원을 가리킬 개연성이 높다. 또한 운봉고원에는 봉화(烽火)를 뜻하는 지명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봐, 강력한 가야왕국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재차 말하지만 죽은 이와 무덤은 말이 없지만 그 들이 남겨놓은 소장품들은 당시 시대상과 과거를 규명하는 블랙박스로 높게 평가 받아야 한다.


전라일보 2017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