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허수경 / 슬픔의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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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린 손가락을 가진 별 같은 독서의 시절은 왔다 세계를 읽다보면 이건 슬픔으로 가득 찬 배고픔으로 억울한 난민의 역사 같아서 빛 속에서 나던 냄새를 맡으며 세계를 여행하는 저 어린 새들에게 아버지 아버지 날 버리세요 하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 죽지 않은 신들 가운데 제일로 다정하던 노을이라는 신이 나에게 달력을 내밀었을 때 달력에는 술잔만 가득했고 아프리카를 떠나서 막 유럽의 해변으로 들어오던 작은 배의 난간을 붙들고 어떤 남자가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데리고 가달라고 가달라고 울부짖었다  

저 지중해에 비명이 없었다면 대륙의 살갗에 거친 몸을 들이대는 배들은 아마도 지중해에서 영혼을 팔았을 터, 저 남해에 소금처럼 아스라하게 널려 있는 섬이 없었다면 우리는 울음을 몰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슬픔은 언제나 가늘게 떨린다 늙은 슬픔만큼이나 가늘게 떨면서 삭아내리는 것도 없다 아주 젊은 슬픔은 격렬하나 가늘게 떨리면서 새벽에 엎드려 있다가 해가 나오면 말라 죽는다 아주 오랫동안 슬픔은 가을의 바다 장미처럼 오랫동안 말라가는 하늘 아래 서 있다 팔랑거리는 잠자리의 날개가 가늘게 공기의 핏줄을 건드리고 갈 때 지는 장미의 그늘 아래 그렇게 조금은 나이가 더 든 슬픔이 쪼그려 있다가 밥하러 들어갔다 남자의 비명이 아프리카에서 넘어들어왔다 해맑은 밤에 따뜻한 눈물 한 방울 어려 있다 누군가 나에게 건네주는 난민의 일기장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