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의 시모음 _ 시시 

곽재구  -  문복근씨의 공기 통조림

내 친구 문복근씨와 대인동
대한극장에서 최인호 원작의 방화
"깊고 푸른 밤"을 보았지
그때가 1985년이었던가
낯익은 골목의 어둠조차 불안하고 섬뜩하던 그 시절
학원안정법을 안주삼아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문복근씨는
주인공 안성기가 미 연방 이민관리국 직원 앞에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억지춘향으로 부르고
불법 체류를 묵인받는 장면 때문에
밤새 눈물을 흘렸었지

계집애처럼 눈이 예뻤던 그 친구
그가 기타 반주에 맞춰
김민기를 부를 때면 애인처럼
한 가슴에 그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
대우 좋은 미국 은행의 국내 지점에서
한 이 년 밥 빌어먹었지만
어느 날 자기 목구멍에서 자꾸만 노린내가 난다고
아니 노린내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횡설수설하더니
어느 날은 문득 독일에 가야겠어
베를린에서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하라를
직접 들을 거야 중얼거리다가
자리를 벌떡 일어서더니 이내 풀이 죽어
그래도 난 이 땅이 좋아 너무
입술로 가만히 매만지더니
그 친구 그런 모습이 애인처럼 사랑스러웠는데

1987년이었던가
유동 삼거리 골목 안 낙지집에서
우리는 석간 기사 하나를 함께 보았지
미 대사관 앞의 장사진
대충 이런 제목이 눈에 들어오고
미국행 비자를 받기 위해 밤을 세워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의 황홀한 기다림을
기사는 감각적 대화체로 얘기하고 있었지
-- America에 왜 가나요?
거기 미국이 있으니까요
-- 미국이요?
아름다운 나라 말이에요
-- 아름다운 건 조국이 아닌가요?
조국이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요
-- 이렇게 다 떠나면 누가 남나요?
그래도 많이 남아요
예를 들면 노동자요 농민이요
그리고 들쥐요

내 친구 문복근씨
석간을 마구 구겨 성냥알을 긋더니
문득 오늘 LA 소인이 찍힌
그의 엽서를 받는다
여보게 내 욕 많이 했제
오월이 또 오는데 그래 숨쉴 만한가
아짐씨도.
천 개의 접시를 닦고
자네의 들쥐.

(January 9th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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