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라디오

5월 금간고 땅끝마을 걷기

내가 그 아이들과 함께 길을 걸었던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너무나도 간디학교란 공간에서 나와 학교에 익숙해진 사람들과 지내는 것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내가 내가 아는 아이들이 있는 공간이 아닌 곳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하게 된다면 잘 지낼 수 있을까?"

라는 개인적인 의구심에 대한 테스트였다.
나는 늘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날을 상상하곤 한다. 언제까지 내가 간디학교에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간디학교도 주니어플라톤 처럼 기한을 두고 들어왔던 터였다. 간디학교에서 내가 지내려고 했던 시간은 딱 6년이었다. 그리고 올해 나는 6년을 살아냈고, 안식년을 맞았다.

  "간디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대안교육 공간에 가서도 나는 그 아이들과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

라는 걱정들. 한 공간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지 모르는 일이므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그래서 마침 금간고로 가시는 쌤과 친해지게 되었고, 금간고는 1학년때 국통종주 같은 걸 하니 때마침 그 쌤은 금간고로 가자마자 1학년 담임을 하기로 했다고 하고 해서 나는 자원교사 자리 하나를 비워달라 요청했던 것이다.

나의 속내를 밝히진 못했다. 테스트도 못해보고 짤릴 게 걱정되기도 했고, 이제 겨우 조금 친해졌는데 그 쌤과의 시간들이 아쉽게 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안식년. 나는 걷게 될지 어떨지도 모른 체 무작정 걷기연습에 돌입했다. 평소에 걸어댕기는 걸 좋아하기도 했지만 스무살의 그 언저리처럼 무작정 하루종일 또 걸어낼 수는 없을 것 같은 나이가 되었기에 연습을 좀 했더랬다. 다이어트 겸 운동 겸, 연습 겸 해서 나는 꾸준히는 아니어도 일주일에 두세번은 그렇게 운동같은 걷기를 연습했다. 체력을 워낙에 좋긴 하지만 혹시 또 모르니까.

결론은...? 잘 지냈다. 나는 그 아이들과 잘 지낸 것 같다.
그 아이들도 내 아이들이 되었고, 그 아이들의 2년 뒤 졸업이 궁금해졌다.
어차피 같은 간디학교 사람들이니 언젠가는 또 볼 수 있을테고 궁금하면 놀러가도 될테고.

자퇴하고 싶다는 아이에겐 자최상담도 해주었고, 죽고 싶다는 아이와는 죽으면 얼마나 아픈지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각자가 많은 사연들을 들고 온 아이들이라 그 이야기들이 더 궁금해지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나는 자원교사의 역할이었다.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한 달을 잘 걸어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이라고 나 스스로 역할을 정하고 시작했다. 아이들이 힘들어 하면 가방도 들어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뒤쳐지면 같이 걷기도 했다. 심심해 할 땐 농담도 해주고, 자기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사람인지 고민을 하는 아이에게는 그 아이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제간교 똘아이들 얘기를 해주며 너희가 얼마나 정상적인 아이들인지도 얘기했다.

나는 늘 아이들의 뒤였다. 그래야 아이들이 뒤쳐지더라도 함께 걷는 다는 게 의미있게 되니까. 배낭을 3개도 들어보기도 했고(어차피 군대에선 4개도 들어봤다. 그러나 그것은 스무살의 초입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ㅋ), 걷기 싫다 하는 아이들을 대신해 담임쌤께 너무 힘들다고 울부짖기도 했다.

나는 늘 말한다. 나는 교사 이기 이전에 아이들과 친구이고 싶다고.
열심히 새로 전학 온 친구처럼 굴었다.

다 걷고 땅끝마을에 도착해서는 다 걷고나서의 후련함이 컸다. 아이들도 우는 아이 하나 없이 어쩜 그렇게들 행복해 하던지 ㅋ

나의 테스트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나의 테스트를 성공적이었다고 여기려 한다.
그리고 성공적이었다고 기억할 것이다.
이젠 다른 공간에서의 삶이 덜 걱정된다.
이젠 정말 조금씩 준비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 덕분에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August 4th 2019)  /  일상